라틴어 수업
정말 와닿는 글귀들을 간추려 보려 했는데 너무 많아서 결국 그날 퇴근길에 바로 서점 달려가서 소장용을 사고 말았다.
이걸 가지니까 마음이 부자가 된 기분!!
읽으면 읽을수록 깊게 생각해야 되는 문장들이 많은데 나의 소유의 책이 아니라서 그것을 잠시라도 생각해보지 못하고 주인인 도서관에 돌려줘야 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는데...
이제 앞으로는 두고두고 오래도록 옆에 두고 읽을수있다 생각하니 눈누난나 즐겁구낭
밑에는 최대한 간추린 건데...좋았던 구문을 발췌해놨다. 짧은 공부력으로 간추린게 이정도...
아 글구 역시 동아시아 최초 바티칸변호사님 답게 종교에서 발췌해서 강의를 하셨는데 이런 성경공부라면 찾아가서 듣고 마음의 치유받고 싶을 정도!!
특강은 다른곳에서도 안 하시는거 같은데 그럼 성당이라도 가서 설교하시는거 듣고 싶다...ㅠ
무슨 형태로든 그 존안을 뵙고 싶당...엉엉엉...
-------------------------------------------------------------------------------------------------
이제는 정말 공부해서 남을 줘야 할 시대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더 힘든 것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의 철학이 빈곤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한 공부를 나눌 줄 모르고 사회를 위해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엄청난 시간과 열정을 들여 공부를 한 머리만 있고 따뜻한 가슴이 없기 때문에 그 공부가 무기가 아니라 흉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공부한 사람의 포부는 좀 더 크고 넓은 차원의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과 달라야 하는 지점은 배움을 나 혼자 잘 살기 위해 쓰느냐 나눔으로 승화시키느냐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배워서 남 주는’ 그 고귀한 가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진정한 지성인이 아닐까요? 공부를 많이 해서 지식인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지식을 나누고 실천할 줄 모르면 지성인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한동일,[꿈꿀 수 없는 사회란 없다], [그래도 꿈꿀 권리])그래서 저는 지금도 공부를 해나가는 본질적인 목적을 잊지 않기 위해 ‘나는 왜 공부 하는가?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공부하는가?’ 스스로 되묻습니다.
저는 공부하는 노동자입니다. 공부라는 노동을 통해 지시을 머릿속에 우겨넣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노동자입니다.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몸이 하는 것이고, 항상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공부하는 습관을 들여 공부하는 노동자가 되어라.
우리가 겪고 받아내야할 감정도 매일 수용할 수 있는 한계치가 있어요. 하루 분량의 한계를 넘은 감정은 내일로 넘길 수밖에 없죠.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Molite ergo esse solliciti in crastinum crastinus enim dies sollicitus erit sibiipse sufficit diei malitia sua.)"-마태복음6장34절-
남에게 인정받고 칭찬받으며 세상의 기준에 자기 자신을 맞추려다보면 초라해지기 쉬워요. 하지만 어떤 상황에 처하든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때 자기 자신을 일으켜세울 수 있습니다.
대학은 취업을 위해 졸업장을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청년들이 스스로에 대해 들여다보고 더 나아가 진리를 탐구하며, 자기 삶을 사랑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돕는 곳이어야 합니다. 학생들도 대학 생활동안 맹목적으로 어떤 목표부터 세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을 우선해야 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할 때 즐거운지 세심하게 관찰해야 하죠. 봄철의 아지랑이가 무심히 길을 걸을 때는 보이지 않고 멈춰 서서 유심히 관찰해야 보이듯이, 내 마음속의 아지랑이도 스스로를 유심히 들여다봐야 볼 수 있는 것이죠. '아지랑이'라는 단어가 억겁의 시간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쉽게 포기하지 말고 시시때때로 그렇게 우리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마다 꽃피는 시기가 다르고, 저마다의 걸음걸이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당장 노력에 대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내가 언제 꽃피울지 미리 알 수 있다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미리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저 그때가 찾아올 때까지, 돌에 정으로 글씨를 새기듯 매일의 일을 조금씩 해나가는 거이 중요합니다.
<어떤 꿈을 꾸십니까>-김택수
한동일: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김택수:제 꿈은 이태원 대저택에 사는 거에요.
한동일:왜 그런 꿈을 꿉니까?
김택수:돈 없는 가난한 삶이 싫어서요.
한동일:저는 그런 꿈 안 꿉니다. 제 꿈은 우리나라에 마에스트로를 100명 정도 만드는 겁니다.
‘배아티투도’
베오: ‘행복’을 뜻하는 동사
아티투도: 태도나 자세, 마음가짐을 뜻하는 명사
=>마음가짐에 따라 행복해질 수 있다.
<Post coitum omne animal triste est.>
(포스트 코이툼 옴네 아니말 테리스테 에스트/모든 동물은 성교(결합) 후에 우울하다.)
열정적으로 고대하던 순간이 격렬하게 지나가고 나면, 인간은 자기 능력 밖에 있는 더 큰 무엇을 놓치고 말았다는 허무함을 느낀다.
즉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개인적, 사회적인 자아가 실현되지 않으면, 인간은 고독하고 외롭고 소외된 실존과 마주해야 한다.
초기의 인류는 삶의 가치와 의미를 신적인 것에서부터 ‘유추’ 하려고 했던 것.
욕을 되도록 안하는 것이 좋겠지만...하고 싶을 때는 고상한 라틴어로 하기로 했다.
Abi pedicatum 아비 페디카툼 빌어먹을, 뒈져버려
Mentula es 멘툴라 에스 머저리 xx
Sane cleus es 사네 콜레우스 에스 시부랄
Stultus es 스툴투스 에스 멍청한 x
Tempus fugit, amor manet.
템푸스 푸지트, 아모르 마네트.
시간이 흘러도 사랑은 남는다.
공부는 무엇을 외우고 머릿속에 지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걸음걸이와 몸짓을 배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라틴어에서 아기라는 단어 ‘인판스’는 인(in)+판스(fans)의 합성어입니다.
‘인’은 동사(형/명/분)앞에 붙어서 부정, 박탈, 반대의 의미
‘판스’는 ‘말하다’를 의미하는 ‘파로(faro)’ 동사의 현재분사입니다.
=>따라서 인판스는 ‘말 못하는’는 이라는 의미가 되고, 실제로 로마법에서 “유아는 말할 줄 모르는 자라고 규정돼있다.
로마법에서는 젊은이의 나이를 만20~45세까지로 규정했는데 이는 군대의 병사충원공급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이것을 돌아보면 유럽인들에게 나이에 대한 강박을 덜어주는 순기능의 역할을 했음을 깨닫는다. 실제로 저자가 “아, 난 무언가를 공부하기엔 너무 늦었어”라고 했을 때, 대부분의 이탈리아 친구들 뿐이 아니라 70세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너는 아직 젊어!’라고 했다는 거다. 라틴어의 젊은이라는 호칭은 인간의 가능성을 아주 크고 길게 볼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았나 싶다.
이탈리아어로 티라미수는 ‘끌어당기다, 잡아끌다’라는 의미의 ‘티라레(tirare)’동사와 방향을 가르키는 ‘위에, 위로’를 의미하는 전치사 ‘수(su)’의 합성어로 위로 끌어올리다 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울적할 때 티라미수케잌을 먹는 의미는 울적했던 기분이 사라지고 기분이 좋아진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리은아, 네가 받은 모든 도움은 내가 주는 게 아니야. 너에게 돌아갈 몫이고, 그저 나를 통해 너에게 전해질 뿐이지.
과거에도 참 수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꿈꿨구나, 하는 생각이 들다가 도 그 사실은 결국 그만큼 힘든 삶의 조건이 인간의 모든 세대마다 있었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희망이 없는 현실 가운데에서 희망을 말하고 희망을 꿈꾸는 존재라는 생각을 합니다.
희망은 라틴어로 ‘스페스spes’인데요,
‘기대하고 바란다’라는 뜻으로 인도 유럽어 'spe'h-s'에서 왔습니다. 반대로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무너지는 순간 절망에 빠지는데, 그래서 라틴어로 절망은 ‘희망이 거두어진 것’이라는 의미로 ‘데스페라티오desperatio'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어의 ’데스퍼레이션desperation'이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희망을 말하기에 전제되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바로 ‘삶’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만이 오직 희망을 말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어야 다른 것을 꿈꿀 수 있고, 크고 작은 것들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지금 사정이 여러모로 안 좋고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이 일을 혹은 공부를 할 수 없어. 나중에 좀 편안해지고 여유가 생기면 그때 본격적으로 할 거야.”라고 하지만 그런 시간은 잘 오지 않아요. 아니, 끝내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왔다고 하더라도 이미 필요가 없거나 늦을지도 모르고요.
‘그가 과연 나에게 상처를 주었나?’
제 마음을 한 겹 한 겹 벗겨보니 그가 제게 상처를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행동과 말을 통해서 제 안의 약함과 부족함을 확인했기 때문에 제가 아팠던 거예요. 다시 말해 제 안에 감추고 싶은 어떤 것이 타인에 의해 확인될 때마다 상처받았다고 여겼던 것이죠.
상처를 통해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요?
분명한 것은 쉽지 않지만 상처가 꼭 피해야 할 어떤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상처는 나의 약점이나 단점을 확인시켜주고 그것을 통해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니까요. 마음의 분별, 마음의 선로 전환기, 그것이 제대로 작동할 때 우리는 무작정 상처받았다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삶에는 간이역 같은 휴게소가 필요합니다. 제 경우에는 상처가 오히려 그런 간이역 같은 휴게소가 되어주었습니다. 멈춰 서서 제 안을 들여다보게 해 주었으니까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Hoc quoque transibit!)'
부처님 말씀에 본래 얻고 잃는 것은 없고 잠시 머물 뿐(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이라고 했습니다. 불가에서 완전이란 없어요. 진정한 완전이란 완전의 상태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완전이란 이미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라 시시각각 새로운 창조다.”라는 말은 그래서 생각해볼 만합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우리는 죽은 자가 간절히 바란 내일이었을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것들에 매이지 마세요. 우리조차도 유구한 시간 속에서 잠시 머물다 갈 뿐입니다.
그 어떤 것을 공부하든 공부가 즐겁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뭔가 거창한 목적마저 있어야 한다면 시작하기 전부터 숨이 막힐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만일 여러분이 뭔가에 관심이 생기고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내가 왜 그것에 관심을 가지게 됐는지, 왜 배워볼까하는 마음이 들었는지 한번 들여다보세요. 그 다음 내 안의 유치함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비난하거나 부끄러워하기보다 그것이 앞으로 무엇이 될까, 끝내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상상해보는 건 어떨까요? 지치고 힘든 과정에서 오히려 또 다른 동기부여가 되어주지 않을까요? 그러니 여러분의 그 마음이 그저 그런 유치함이 아니라 ‘위대한 유치함’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라틴어의 성적구분
Summa cum laude 숨마 쿰 라우데/최우등
Magna cum laude 마냐·마그나 쿰 라우데/우수
Cum laude 쿰 라우데/우등
Bene 베네/좋음, 잘했음
이처럼 평가 언어가 모두 긍정적인 표현입니다.
‘잘한다/보통이다/못한다’식의 단정적이고 닫힌 구분이 아니라 ‘잘한다’라는 연속적인 스펙트럼속에 학생을 놓고 앞으로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겁니다. 이렇게 긍정적인 스펙트럼 위에서라면 학생들은 남과 비교해서 자신의 위치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거나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의 발전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남보다’잘하는 것이 아닌 ‘전보다’ 잘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타인의 객관적인 평가가 나를 '숨마 쿰 라우데'라고 하지 않아도 우리는 '수마 쿰 라우데'라는 존재감으로 공부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스스로 낮추지 않아도 세상은 여러모로 우리를 위축되게 하고 보잘것 없게 만드는데 그 가운데 우리 자신마저도 스스로를 하찮은 존재로 여긴다면 어느 누가 나를 존중해주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스스로에, 또 무언가에게 '숨마 쿰 라우데' 입니다.
각자 자신에게 맞는 공부법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가는 첫 단계가 진정한 공부의 시작입니다.
라틴어로 '공부하다'란 동사의 원형은 '스투데레studere'이고 여기에서 영어의 '스터디study'가 유래했습니다. 본뜻은 '전념하여 노력하다, 갈구하며 몰두하다'로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며 노력하는 것이 '공부하다'라는 뜻입니다.